▒ 재단법인 대한 불교 일붕선교종 ▒
 
  일붕 사상 조명 (2)
  글쓴이 : 일붕선교종     날짜 : 06-05-08 19:42     조회 : 3860    
- 마음은 허공도 물질도 아닌 모든 존재 이전의 실제이다. -

선정신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세계 속에 강력히 심어져야한다고 일붕 서경보 박사는 힘주어 말한다.
일붕께서 세계 곳곳에 일붕 선원을 개설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깔려있다.
육조혜능선사(六祖慧能禪師)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 화려한 것이 꽉 차 있다.( 本來無一物, 無一中無盡藏有花日樓台』라고 갈파했다.
선의 진리란 섬광과 같이 우리 자신을 꽉 차게 하는 것이다. 선은 우리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깨달은 것은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가 선을 계기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정신적 노력인 것이다.
비록 우리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선 또한 쉽게 알 수 있는 세계는 아니라고 할지언정 그것은 주관이나 자의적인 것을 벗어나기 때문에 인간 모두가 지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선은 인간의 숨결이며 평화의 상징이라고 일붕 대승정은 주장한다.
선을 지양하는 마음은 늘 푸른 이끼처럼 우리들의 정신을 싱싱하게 적셔주고 우리의 참뜻을 전달해 준다.
선 정신은 전 인류의 마음속에 안정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도 수행되어야 한다.

선을 깨달은 인류의 자세는 일체가 용해되고 모든 대립을 넘어 선 평화의 숨결로서 자비와 사랑의 충만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누구나 선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미 ․ 러를 비롯한 초강대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지구상의 60억 인구를 수십번이나 몰살시키고도 남는다고 한다. 미 ․ 러 간에 군축회담이 진행되고 있으나 그것이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세계인류는 그 화약고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아래 놓여 있다.
주위에 잠시 눈길을 돌려 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 우리를 묶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구는 두 쪽으로 나누어져 생존의 자멸을 초래하는 열차가 양쪽에서 질주해 오고 있는 형국이다. 사바의 중생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도 모른다.
선의 경지에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인간은 있어도 인간의 마음은 없다.
물은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갈구하며 영원히 그 요구점을 찾아 움직이게 마련이다.
일붕 서경보 박사는 불자들 앞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강론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그 자체가 허공도 아니요, 물질도 아닌, 물질과 허공 그 모든 존재 이전의 실제인 것이라고, 「마음은 곧 나」라는 것이 생명 본체인 것이다. 그것은 곧 전 우주의 생명으로서 지식도 신앙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니며 설명할 수도 없고 또한 생각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요, 나인 것이다.
듣고 보고 생각하게 하는 주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적 예지는 과학으로도 그 실마리를 풀 수 없다.
우리는 불은 뜨겁고 얼음은 차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들은 뜨겁거나 차거나를 모른다.
따라서 대자연계는 달고, 쓰고, 차고, 더운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생각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인 그 「마음」은 직접 현상계를 지었다 허물었다 하는 우주조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나 자신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구와 그리고 자유와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마음을 찾는 선(禪)수행은 역사의 전환기에 늘 고조되어 왔고 또한 민족정신을 부각, 약동케 하는 활력소가 되어 왔던 것이다.
현대는 나를 찾는 길과는 반대로 나를 잃어가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선이 또한 강렬하게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조시대의 불교배척정책으로 유생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박해를 추호도 개의치 않고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호국과 보국(報國)의 선사상으로 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호국과 보국의 선사상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를 낳았다.
일붕 서경보 박사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러한 선사상 정신이 그대로 남북통일의 대업 달성에 적용될 때 절망의 구름은 활짝 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게 했던 것이 선사상이라는 것은 중국의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서양에서도 세계평화를 위해 선사상이 필요하다는 데 어렴풋이나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를 위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차대전 때 인도의 네루 수상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하루에 15분만이라도 좋으니 요가(坐禪)를 하십시오. 그러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의 구름방향이 달라질 것입니다.』라고 요가를 권고했었다고 한다.
일붕 서경보 박사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위하여』이제 전 세계 인류는 상실했던 본 마음을 찾아 올바른 자기를 발견하는 선사상 앙양에 매진할 것을 부르짖고 있다.
그는 진정한 세계평화는 무기와 전쟁이 아니고 오직 「내 마음의 평화」를 찾는 선(禪)에 의해서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일붕 서경보 박사는 사람의 「마음」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의 사상 밑바닥에는 이 「마음」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다. 자연 속에서 사회적으로 얽혀서 사는 것이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붕 서경보 박사는 대단히 어려운 말 같으면서도 대단히 쉬운 말로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초월하고 자기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초월해야 한다.」
이 말의 뜻은 자연도 자기도 서슴없이 버린다는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무(無)를 가리킨다.
즉 자연도 자기도 무(無)로 돌아간 상태가 되면 삼라만상이 똑같이 절대평등의 경지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평등」이란 경지는 우주만상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우주만상에 아무런 상(象)이 없게 된다.
즉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어떤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떤 형상이 눈앞에 전개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어떤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각(覺)이 생(生)하기 전의 상태 - 그것이 곧 참마음, 진(眞)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눈, 귀, 코 등 몸에 5관(五官)을 지니고 있다. 불교에는 여기에다 의(意)를 하나 더 첨가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인간이 생활하기 시작하면 바로 이 육근작용, 즉 생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저 사람은 똑똑해」
「아니 저 친구 무식해」
「저 여자 아름다워」
「아니 추하게 생겼어」 등등
높음, 낮음, 길고 짧고, 아름답고 추한 등등의 상(相)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이 일어나면 자연히 괴로움(苦)이 태동하게 된다.
번뇌, 애욕, 물욕(物慾), 불안, 갈등, 초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예로 저기에 산이 있다고 하자.
그 산 자체가 아름답거나 밉거나 하지 않는다. 그 산이 아름답다거나 밉다는 것은 다만 내 생각뿐이다. 이 생각이 그러한 상(相)을 일으키게 한 것뿐이다.
새 소리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뇌성벽력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생각이 아름답게 느끼게 하거나 무섭다고 생각되어 벌벌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게 하는 것뿐이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즉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천문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천체에서는 수억의 별들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생멸작용이 반복되고 있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태양도 달도 50억년 뒤에는 없어진다는 것 아닌가.
유물론을 옳다고 생각하여 연구하던 유물과학도 이제는 바닥이 들어나고 있다.
물질은 어디까지나 물질인 줄로 믿고 물질을 자꾸만 파헤쳐 들어가 보니 결국 물질의 근원은 물질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자의 소립자는 제 혼자의 힘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또 어떤 것은 질량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기도 하고 또 그런 소립자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진공(眞空)에서 원인불명으로 생성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눈이 낱낱의 원자를 볼 수 있는 전자 현미경과 같은 미시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물론 벽도, 산도, 지구도, 별도 모두 허공으로만 보여 인간의 물질관은 애당초 달라졌을 것이다.
만일 X-레이 안경으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뼈만 앙상한데 연필만 움직이는 형상으로 보일 것 아닌가. 나아가 뼈까지 투시할 수 있는 전자현미경으로 본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여기 없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나는 없지만(無), 여기 분명히 내가 있음에(有)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동양에서 몇 천 년 전에 이미 각성한 유무상통(有無相通)인 것이다.
생(生)과 사(死)도 이와 같이 육체라는 것이 이 물질만 벗었다가 어떤 인연으로 전자들이 다시 모여 형상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무를 초월하여 상통한 자리가 바로 마음의 자리이다. 이 마음의 현현(顯現)이 바로 만상(萬象)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핵인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
              .
              .

           (계속 이어짐)

              .
              .
              .